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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삭면, 그 이름의 유래
고령삭면(古寧朔面) 그 이름:
1) 령삭진(寧朔鎭): 고려사(제83권, 志36권 兵二)에 따르면,
‘령삭’은 고려 문종(文宗) 4년(서기1050년) ‘안의진 ’(우측 사진)의 ‘진자농장’(安義鎭 榛子農場)에 세워진 진(鎭)의 이름이다: “문종 … 4년에 … 안의진 진자농장에 성을 쌓아 ‘령삭진’이라 하고 변방 적의 요충을 진압하였는데 668 칸(間)에 문(門)은 여섯 샘(우물, 水口)은 셋이며 성 머리에 열 세곳을 쌓고 다섯 곳을 세워 가렸다’(文宗 … 四年 … 城安義鎭榛子農場爲寧朔鎭以扼蕃賊要衝六百六八間門六水口三城頭十三遮城五). 安義鎭의 榛子農場에 鎭을 세우고 그것을 寧朔鎭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가 고려 문종 4년(1050)이니까, 지금(2009)으로부터 991년 전에 고려 북계(北界)의 어느 한 ‘진’(鎭)을 가리키는 이름, ‘령삭’이 생겨났던 것이다. ‘령’(寧)은 ‘평안하다’는 것을 그리고 ‘삭’(朔, 초하루)은 ‘북녁’을 뜻하니까 ‘령삭’이 지니는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아마 ‘북쪽 경계 어느 한 평안한 지점’ 정도일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령삭진’ (아래 사진)의 정확한 위치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34년, 순조 34)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아래 아래 우측 사진은 아래 사진 왼쪽 하단 귀퉁이의 ‘령삭’ 부분을 확대 해 놓은 것이며 아래 아래 좌측 사진은 관련 표도지標圖地이다). 1945년 해방 당시 고령삭면의 중심지는 천마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대하산을 동동남쪽으로 마주 바라 보고 있는 영산시(구창동)였는데,
대하산너머 바로 이 영산시(2009년 지금은 구반동이라고 불리움)에 대척되는 부근이 폐하여져 유적으로 남아 있는 오래된 진(古鎭)과 오래된 성(古山城)의 ‘령삭’으로 대동여지도에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하산 정상에서 영산시는 약 십리 정도 서서북 쪽으로 떨어졌지만 령삭진은 대하산 정상에서 약 이십리 정도 동동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20090630 현재 북한 행정구역의 어궁구(만소봉529m)일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의 고령삭면 영산시와 고려 문종 당시의 ‘령삭’은 대하산을 사이에 두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셈이 된다.
*)‘진’(鎭)은 고려 현종 9년(1018)에 확정된 지방군사행정조직으로서, 북방의 국경지대인 ‘북계’(北界)와 동쪽 국경지대인 ‘동계’(東界) 이 양계(兩界)에만 설치됐다. ‘령삭진’은 ‘북계’에 속한다. “ ‘계’(界)는 국경지대의 군사지역이었던 만큼 행정단위인 ‘진’(鎭)마다 초군(秒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주진군(州鎭軍)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었다. 이들은 평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언제나 싸울수 있는 둔전병적(屯田兵的)인 상비군이었다”(이기백, 한국사신론, 2002년). 이와는 달리 경기∙전라∙경상∙양광∙교주∙서해 등의 ‘도’(道)의 경우에는 ‘진’(鎭)이 아니라 ‘군’(郡)과 ‘현’(縣)이 설치된다(이기백, 위의곳 참조).
**)안의진(安義鎭)은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및 정주군(定州郡)에 설치한 고려시대의 진(鎭). 고려 성종(成宗) 14년(995)에 서희(徐熙)를시켜 서북변(西北邊) 지방을 개척하기 위한 성(城)을 쌓게하여 수주(隨州;定州郡 관내)에 예속시켰다가 조선 세조(世祖)때 구성군으로 이관(移管)시켰다’(학원세계대백과사전 20권 74쪽). 안의진의 ‘진자’농장이라 하였으니 령삭진이 설치된 안의진 그곳에는 개암나무(진자 榛子)가 많았던듯하다.
2) 고령삭진(古寧朔鎭): ‘령삭’이 ‘진’의 이름으로 생겨난지 436년이 흐른 조선 성종 17년(1486년)에 출간된 ‘동국여지승람’에서 ‘령삭’에 ‘고’(古)가 붙은 ‘고령삭진’ 이라는 이름이 유적지로 기록 확인된다: ‘[古跡地, 古寧朔鎭은 義州의 동쪽 1백 20리에 있다. 고려 문종이 안의진의 진자농장에 성을 쌓고 령삭진이라 하여 변방 적의 요충을 진압하였다. 성의 둘레가 7천 7백 60척(尺 )이었는데, 지금은 토성(土城)의 남긴 자리만 있으며, 안에는 3 개의 우물(井)이 있다 古寧朔鎭在州東一百二十里高麗文宗城安義鎭榛子農場爲寧朔鎭以扼蕃賊要衝城周七千七百六十尺今有土城遺基內有三井’(신증동국여지승람 제53권 義州 古跡, 중종 25년-1530년-에 출간). 고려 문종 4년(1050)의 령삭진은 폐해져 이제(조선 성종 17년, 1486년) 그 오랜(古) 흔적으로 토성 자리와 그 안에 우물 세 정이 남아 있는 유적지(遺跡地)로 변한 것이다. 바로 이것에서 ‘고령삭’ 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그러니까 ‘고령삭’ 이라는 이름은 폐허로 남아 있는 것으로 조선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에 기록 확인된 고려 국경 수비대 주둔지(鎭, 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곳 ‘고령삭진 ’은 의주에서 동쪽으로 일백 이십리 떨어져 있었다.
*) 一尺을 척관법에 따라 한 자(30.3cm)로 계산하면 고령삭진의 둘레는 약 2.424Km가 된다.
**)고령삭진古寧朔鎭에 대한 학원대백과사전 제2권(565쪽)에 실린 설명은 다음과 같다: “고령삭진 古寧朔鎭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에 있던 옛지명. 「고령삭진은 의주목(義州牧)의 치소(治所)에서 동쪽으로 120리 떨어진 구성(龜城)의 안의진(安義鎭) 진자농장(榛子農場)이다. 고려 문종(文宗)때 성(城)을 쌓아 영삭진(寧朔鎭)을 설치하여 번적(蕃賊)을 막는 요새가 되었으며, 성의 둘레가 무려 7,760 척(尺)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토성(土城) 안의 옛터에 3 개의 우물이 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을 폐지하고 고령삭진을 의주목에 귀속시켰다”.
3) 고령삭창(古寧朔倉)과 고령삭방(古寧朔坊): 그런데 의주에서 ‘동쪽으로 80리’(大東地志 券二十三 義州 倉庫) 떨어진 곳에는 ‘고령삭’ 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고령삭창’(古寧朔倉)’이 ‘고령삭방’(古寧朔坊)에 있었다. 이 ‘고령삭창’이 의주에서 동쪽으로 80리 떨어진 곳, 고령삭방(古寧朔坊) 에 있었다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제23권(조선 고종 1년, 1864년)에서 기록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제 비로서, 비록 ‘면’(面)이 아니라 ‘방’(坊)이 그 뒤에 붙었기는 해도, 민간인의 집단 거주지를 가리키는 ‘고령삭’(古寧朔) 이라는 이름이 문헌에서 확인된다. 물론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언제부터 고령삭면 그 지역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는 해도 말이다.
*)‘창’(倉)이란 정부 구휼미와 군량미 등의 곡식을 보관하고 있었던 창고로서, 이곳에는 조선 고종 1년 을유(1864년) 당시 정부관리 감독관 한 명이 파견되어 있었다: ‘고령삭창 감독관리 1 명, 古寧朔倉監官一員’(龍灣誌 官職 任班鄕任).‘방’(坊)이란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에서 ‘면’(面)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고령삭방은 동쪽으로 80리이다 古寧朔坊東八十里’(大東地志 券二十三 義州 坊面)’.
4) 고령삭면(古寧朔面): 이로서, 그리고 다음을 봐서, 우리는 현존 문헌에서 확인 가능한 ‘고령삭’ 이라는 이름은 고려 문종 4년(1050년)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의주 동쪽 60리부터 120리 사이의 좌우 강역(彊域,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상하 폭은 아래 ‘5) 고령삭성’ 참조. 실제로 이 좌우 폭을 지닌 지역이 최초의 독자적인 의주군지인 ‘용만지’(龍灣誌 , 憲宗 15年 己酉 1849年)에서 의주군 ‘고령삭면’(古寧朔面)으로 표기된다. 부(府)에서 동(東)으로 60리 떨어진 대하산과 동으로 130리 떨어진 천마산은 모두 고령삭면 내에 소재하고 있다고 용만지의 ‘산천’(山川) 항목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천마산은 의주부에서 백 삼십리 고령삭면에 있는데 동쪽 삭주 계반령으로부터 뻗어 온 산이다 天摩山(在府東130里古寧朔面東自朔州鷄畔嶺來爲是山) … 대하산은 의주부 동쪽 60리 고령삭면에 있는데 천마산에서 이어져 내려 와 고진강 상류에서 멈추[어 선 산으로서], 가물 때 이 곳에서 기도를 드렸다 大蝦山(在府東60里古寧朔面東自天摩山來止古津江上流旱時祈於此)”]. 이 때(1849년)의 고령삭면에는 579 가호(家戶)의 8개 里가 있었다 : 一寧朔里∙東巖里∙舊倉里∙舊北理∙古城里∙天摩里∙大蝦山里∙三峰里.
*)1909년 관제개혁 때는 1849년의 8 개 리에서 10 개 동(洞)으로 개편된다: 舊倉洞∙一寧洞∙舊北洞∙西古東∙東古洞∙天摩洞∙ 大鰕洞∙圓峰洞∙東巖洞∙三峰洞∙(의주군지편찬위원회, 의주군지, 1975년, 424쪽 참조). 이러던 것이 ‘1954년에는 북 정권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의주군 고령삭면을 천마군으로 개편 면을 없애고 7 개 리(천산리, 동고리, 서고리, 영산리, 일령리, 삼봉리, 대하리)로 개편된다’(고령삭면면민회, 비망록, 2005년, 27쪽). 그래서, ‘고령삭면’ 이라는 이름의 행정조직은 이제 북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땅은 있어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는 잃어버린 우리 면의 이름과 옛 지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9년 현재 고령삭면면민회 조직은, 의주군민회와 다른 면민회들처럼, 1945년 해방 당시의 행정구역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용만지: 의주군은 고려 때 용만현으로 불리웠다. 용만지는 현존하는 최초의 의주군지이다.
5) 고령삭성(古寧朔城): 그러나 고려 문종(재위 1046~1083년) 때의 ‘령삭’ 이라는 이름은 1945년 현재 ‘의주군’ 내의 어느 일정 지역 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령삭면에 인접했던 철산군의 한 지역 역시 고려 문종 연간의 ‘령삭’이라는 이름에 의해 가리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486년(조선 선종 17년) 당시에 이미 폐허로 변해있던, 철산군 고적지(古跡地) ‘고령삭성’이 바로 그것이다-‘령삭진’과 마찬가지로 ‘령삭성’에도 그 즈음에 ‘고’(古)가 붙었다는 것에 유의! 따라서, 철산군(鐵山郡) 동쪽 四里에도 바로 ‘고령삭’ 이라는 ‘성’(城)의 이름이 있었다는 것: ‘오래된 유적지 … 고령삭성은 [철산]군 동쪽 4리 되는 곳에 위치하는데, 돌로 쌓아 올려져 주위 둘레가 1200척이었다. 오래 전에는 만호(萬戶)가 다스렸으나 지금은 폐하여졌다. 의주 령삭진과는 다르다. 古跡 … 古寧朔城在郡東四里石築周一千二百尺舊有萬戶營今廢與義州寧朔鎭異’(신증동국여지승람 제오십삼권 철산). 의주의 ‘령삭진’과는 다른 곳(지역)일 뿐만 아니라 ‘진’(鎭)이었던 의주의 ‘령삭’과는 달리 ‘성’(城)이기는 해도 철산군 그곳의 이름이 ‘령삭’이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우리는 ‘령삭’ 이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변경(북계, 北界) 요새가 고려 문종 연간에는 1945년 ‘현재’의 ‘고령삭면’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적어도 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령산’ 이라는 이름으로 가리켜지던 그 당시 지역은 현재의 의주군 고령삭면과 철산군을 따로 가리킬 만큼 상하좌우 폭이 넓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령삭’ 이라는 이름이 고려 문종 연간에 어느 한 지역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평안한 북쪽 경계 어느 한 지점, 국경 수비대 주둔지’을 일반적으로 뜻하는 보통명사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령’(寧) 또는 ‘삭’(朔)이 붙어 형성된 다른 지명들을 고령삭면과 그 주위 지역에 관련된 옛 문헌에서 여럿 발견 할 수 있다. 예를들어 ‘삭’주군(朔州郡)과 그리고 천리장성을 이루는 여러 지역들(‘寧’海∙‘寧’德∙‘寧朔’∙‘寧’遠∙‘朔’州, 고려사 제82권 志제32권 兵二). 이것은 고령삭면이 속하였던 그 당시의 고려 북쪽 경계 지역에 대한 거란과 여진족의 침탈과 이에 대한 고려의 대응책을 통해 ‘령’과 ‘삭’을 포함하는 고려 옛 지명들이 생겨 났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옛 지명들 중의 하나가 이어 내려와 역사 속에서 생존한 것이 바로 고령삭면 이라는 이름이다.
지금은 잠시 사라진듯한 이 지명을 다시 살려내는 정치행정을 펼져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살아남은 후예들에게 부여된 역사적인 임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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